“ 테오도르씨? ”
“ 깨어 나셨네요― 테오도르씨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
“ 테오도르씨 여기 봐주세요-! ”
[ 테오도르.. ]
눈을 뜨자 쏟아지는 빛 세례에 그는 뜬 눈을 다시 감았다. 떠도는 알콜향, 링거 덕에 저린 손목, 무거운 몸, 마치 긴 꿈을 꾸고 일어난 듯 피곤함이 덮쳐왔다. 마지막 기억은 음료를 마시고 쓰러지던 제 자신.. 그제서야 깨닫는다. 난 살아있는 건가..?
간호사와 담당의의 제지에 사라진 기자들의 모습에 그는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뜩 갑갑한 제 목에 손이 간다. 붕대로 감겨진 듯 거친 제 목의 촉감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입을 벌려 말을 꺼내보려 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과 같이 목소리까지 가라앉아버린 듯 잘 나오지 않았다. 옆에 놓인 제 짐들을 매만지다 주머니 속의 묵직한 기억을 꺼내 보인다. 곰돌이 열쇠고리가 달려있는 예전의 집 열쇠. 손에 쥐고 있으니 차가운 쇠의 느낌에 손이 시릴 법도 한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안도감과 의문. 잘 살아있을까..? 저도 모르게 문뜩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곤 무언가 찾는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병실을 나섰다. 길을 잘 걷다가도 그는 사람이 많아질 때면 속이 더부룩하고 기운이 빠져갔다. 사람이 적은 복도로 돌아돌아 가던 그 때, 열쇠고리의 곰돌이가 짤랑였다. 새하얀 머리칼에 대조되는 붉은 얼굴. 열쇠의 주인 이였다.
말도 얼마 못 걸어본 상대였다. 얼굴도 사실 많이 마주친 적 없이, 같이 사는 듯 아닌 애매한 관계의 사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르게 그는 그 소년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전 사람들을 바라볼 때 몰려오던 더부룩함은 사라지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본적 없던 웃는 얼굴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년은 고장나버린 수도꼭지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를 울음 이였지만 진정시켜줘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도닥여주었다. 그 때 잠깐 이였지만 소년의 머리를 도닥여주면서 이전에도 구도는 다른 위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위로해준 것이 떠올랐다. 울음을 그친 소년의 모습은 언제 바스러져 사라질지 모를 정도로 연약해보였다. 그런 모습에 그는 소년과의 미래를 기약했다. 잠깐 스쳐지나갔을 사람 이였지만 이미 그는 소년에게 향한 제 심정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에 접어들고 제가 살았던 별장으로 돌아왔다. 별장은 마지막에 본 모습에서 많이 변해있지 않았다. 치워진 음료수, 가지런히 놓인 편지들, 쇼파 위에 놓인 조금 큰 곰돌이 인형.. 그는 쓰러지듯 쇼파 위에 누워 곰돌이인형을 끌어안았다. 가만히 그러고 있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흠칫 놀란 그는 제 눈을 훔쳐내었다. 눈물 이란걸 흘려본 적이 별로 없던 그로써는 매우 놀랐을 일이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병실에서 미래를 기약했던 예전 룸메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돈을 들여 최대한의 정보를 모았다. 이전에 같이 지냈을 때의 정보부터 시작해 가까스로 소년의 현재주소를 알 수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간 주소의 집은 부재중 이였다. 몇 번의 노크 후 돌아가려던 찰나 그는 집주인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붙들렸다.
“ 혹시 이 집 학생과 아는 사이야? ”
짜증이 묻어난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그에게 줄줄이 하소연을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집에 잘 안 오더니 월세는 밀려있고 짐은 남아있다는 류의 이야기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하얀 백지수표와 펜을 꺼내 메모를 남기고 집주인에게 준 후 발걸음으로 옮겼다.
[ 앞으로의 월세, 이걸로 다 해결 하세요. ]
동정 이였던 걸까? 사회기부? 돌아오는 내내 제가 한 행동에 의문이 들었다. 처음 이였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갈 해주고픈 느낌이 든 적은 처음 이였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가을바람을 맞은 듯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 그의 발걸음을 자주 소년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흘끗 보며 지나치듯 지나가다 점점 무언가 챙길 거리를 들고 주변을 배회하다 지나가기도 했다. 이런 걸 좋아해주나? 귀찮아하지 않나. 하는 고민도 잠시. 결국 [건강 챙겨.] 하는 작은 메모와 함께 물건을 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문자를 보내볼까 하는 고민도 많았다. 전화번호는 이전 그대로였지만 선 뜻 문자를 줄 수는 없었다. 몸은 괜찮은가, 재활이 필요하다고 봤는데, 돈이 부족하진 않을까, 알 수 없는 고민들을 하며 핸드폰을 들고 있다 아무 일 없이 놓아두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경험이 없었기에 겁을 먹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전의 가족들처럼, 낳아두고 저들이 정해둔 길로만 걸어가게 만든 그들처럼 냉대한 반응이 돌아올까 선 뜻 문자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소년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소년과의 만남에 긴장했는지 들떴는지, 발걸음이 빨라져왔다. 말주변이 없는 저의 모습에 당황해하는 듯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입을 열려다 소년의 말에 입을 다시 다물었다. 웃는 얼굴로, 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천천히 하나하나 소년은 말해주었다. 가족사, 건강, 챙겨둔 약, 지금의 심정.. 그에겐 생소한 이야기들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경청하고 있었다.
“ 고마워요, 챙겨줘서,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줘서 고맙다고 꼭 얼굴 보고 말하고 싶었어요. ”
소년의 말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느낌은 뭘까. 소년에 대한 대견함..? 아니면, 제 자신에 대한 과분함. 소년의 웃는 얼굴에 이전의 그 때처럼 머리를 부드럽게 도닥인다. 다가오는 따스함을 받아내도 괜찮을까. 일전의 사고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손을 뻗어 따스함을 받아냈다. 이번엔 다르지 않을까? 도박에 도전하듯 말문을 열었다.
“ 괜찮다면, 같이 지내는 건 어때. ”
-
마침 매니저 자리가 비어있다는 핑계로 일을 주고, 같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는 제가가진 것을 건네주기도 했다. 월급, 용돈, 등등.. 여러 이유로 그는 소년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하나하나 나누어주었다. 작게 툴툴대는 소년의 모습에 무덤덤하게 그냥 쓰라고는 했지만 속으론 많이 조마조마 했던 그였다. 매니저로써, 같이 사는 동거인으로써, 그는 소년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갔고, 알아간 만큼 보답하듯 이런저런 선물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요리를 시작했다.
그 사건이후 먹을거리는 잘 먹지 못했다. 가끔 재활을 핑계로 병원에서 영양제로 대신 살아오던 그는 소년의 음식에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수프. 제 자신을 생각해서 만들었다는 생각에 입고 있는 폴라티 뒤에 숨겨진 제 상처를 손으로 살짝 쓸어보였다.
“ 저 요리 배워서 잘해요! 맛은 보장해요. ”
소년은 자신 있게 말을 꺼냈다. 이상하게 그 말에 안심이 된 속에 한 숟갈 떠서 먹어본다. 따스한 스프가 넘어가면서 은은한 향이 입안에 퍼져온다. 그 따스함에 가슴이 다시 한 번 쿵 하고 묵직해온다. 이런걸 뭐라고 하지? 감동.. 했다고 하던가. 스프를 남김없이 해치우고 맛있네. 하는 간단한 말 한마디에 소년은 기쁜 듯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그는 저려오는 코끝에 괜스레 모른 척 잡지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과 살아오면서 그는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호기심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놀라는 일이 많았다. ‘감정’ 이라는 것에 둔했던 그는 소년 덕에 잠들어있던 속마음들이 하나하나 깨어남을 느꼈다. 따스함, 다정함, 포근함, 슬픔, 분노, 아픔, 걱정, 외로움, 안쓰러움,.. 고마움, 그리고..
...
아직 알 수 없던 딱 하나의 감정이 있었다.
아프던 서로를 돌봐주고, 서로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며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한쪽이 부족함을 느끼면 다른 쪽이 채워주듯. 서로를 위한, 서로의 모습, 그렇게 그들은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은 소년이 울음에 젖은 목소리로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 놀란 얼굴로 뛰어간 그는 울음에 가라앉은 소년을 가만히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했다. 안아주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직 모자랐던 걸까.. 그 후로 그는 소년에게 좀 더 사주고, 챙겨주고, 더 아껴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곰돌이인형과 닮은 큰 토끼인형, 둘이 자기에 좁은 쇼파를 치우고 둘이 편히 쉴 수 있는 침대크기의 쇼파, 추위를 많이 타는 듯 보이는 소년에게 더 두꺼운 새 옷들을 주기도 하고, 이전보다 몇 배는 뛰어오른 월급.
제게 다가와준만큼 주고 싶었다, 채워주고 싶었다, 챙겨주고 싶었다, .....좋아해줬으면 싶었다.
그만큼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존중해주고 싶었다. 즐거운 듯 말을 꺼내면 들어주고, 가만히 소년이 뱉어내는 것들을 속에 담아두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눌러 담아내었다. 터져버릴 때까지 꾹꾹 눌러 담았다.
“ 나, 형을 좋아해요. 많이 좋아해요. ”
좋아한다. 다른 사람을 아끼어 친밀하게 여기거나 서로 마음에 들다. 사전적 의미로만 알고 있던 말 이였다. 하지만 소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지금까지 담아두었던 말들과 감정들이 그의 몸에서 폭발하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저 바닥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소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좋아한다. 그는 그 애매한 말이 잘 이해가지 않았다. 아끼고 친절하게 대하다. 하지만 그의 심정은 그보다 한 단계 위였다. 같이 지금처럼 살아가면서 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고, 많은 것을 그 만큼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제서야 그는 떠올렸다.
[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
그는 바닥에 펼쳐진 심해에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가 사라질 듯 보이는 소년을 끌어안았다. 이전보다 더 힘주어 그러면서도 부서지지 않게끔 부드럽게-
억지로 웃을 소년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소년을 사랑했기에- 사랑하고 있기에 그랬다.
갈라져 버린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문을 연다. 글로도, 그 다른 어느 걸로도 아닌 제 입으로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작지만 확연한 목소리로 소년의 귓가에 작게 중얼거린다.
“ 사랑해- 주미율. ”
-